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문단 편집) == 생애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가정적으로 개막장이었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전혀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 이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아내와 평생 금슬이 좋았고 자녀들에게도 가정적인 아버지였다. 프로이센은 1795년 [[프랑스 제1공화국]]과 바젤 조약을 체결하여 마인강 이북의 독일 지역 영향권을 인정받고 [[하노버 선제후국]]을 점령한 상태였다. 즉위 후에도 프랑스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도 중립을 지켰으나, [[나폴레옹]]이 [[라인 동맹]]을 결성한 후 하노버를 [[영국]]에 반환한다는 썰이 돌면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1807년 예나-아우어슈타트에서 나란히 박살이 나자 프로이센의 영토 끝자락에 있던 틸지트[* 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소베츠크. 당시에는 [[동프로이센]]에 속했다.]까지 도망갔다. 여기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중재로 나폴레옹에게 굴복하며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일·폴란드 원정]] 참고. 결국 내각이 들어서고 전쟁 배상금 문제로 나폴레옹이 등용을 승인한 프로이센 초대 총리인 카를 폰 하르덴베르크가 [[재상]]이 되어 실권을 갖게 된다. 나폴레옹 황제는 '''"한심한 국왕, 한심한 군대, 한심한 나라"'''라며 코앞에서 대놓고 그를 조롱했지만 패망한 처지라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에게 개털린 이후 [[러시아 원정]] 전까지는 블뤼허 등의 애국파 및 개혁파들을 프랑스의 압력에 일시적으로 내쳤으며 러시아 원정 때는 출정 전야식에서 독일 내 군주들을 대표하여 '''나폴레옹의 무운을 빌며 건배 선창을 외치는''' 역할을 맡았다. 반프랑스 동맹을 지지하는 신하들의 주장을 무시하다가[* 이는 당시 프로이센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프랑스군]]이 건재하고 [[프로이센군]]은 궤멸당했는데 애국을 부르짖으며 러시아의 손을 잡고 싸웠다면 프로이센은 [[사르데냐 왕국]]의 [[피에몬테]]처럼 일개 데파르트망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하르덴베르크가 러시아와 칼리시 동맹을 체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여 프로이센은 반프랑스 동맹에 재참가했다. 클라우제비츠를 비롯한 친내각파 군인을 앞세워 왕의 말을 거역하고 나폴레옹과 전투를 벌였고, 이후 러시아 원정을 하고 온 나폴레옹을 [[나폴레옹의 몰락|역관광]]시켰다. 전쟁 후 본인이 직접 [[빈 회의]]에 참석하긴 했지만, 역시 재상인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가 사실상 모든 실무를 대표했다. 인재를 등용하는데는 편파적이지 않아서, 매우 호전적이고 교양이 없어서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는 중용을 받지못한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블뤼허]]가 나폴레옹과의 싸움을 지속할 수 있도록 밀어주었다. 쿠투조프가 개고생할 동안 훼방만 열심히 놓은 알렉산드르 1세보다는 나은 정도. 또한 귀족이 아닌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샤른호르스트]]를 초빙하고, 육군 개혁안을 제출하며 그가 요구한 귀족 신분과 참모총장 직위라는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요구에도 그걸 받아들였다. 또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에 동행한 [[클라우제비츠]]가 탈영을 감행 후 러시아로 종군하였으나, 러시아 측 대표로 자국에 협상하러 온 그를 사면하고 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삼았다. 블뤼허,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등도 재기용했다.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꽤나 융통성 있고 유능한 인재들에게 관용을 베푼 편이었으니 본인이 무능하다고 해서 폄하할 만한 군주는 아니다. 결국 이렇게 중용한 인재들이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 이후 발전 없이 안주하던 프로이센의 군제를 개편하고 나폴레옹에게 최후를 안겨주는데 일조한 셈. 그 외에 슈타인 남작의 개혁과 [[베를린 대학교]] 설립, 샤른호르스트의 군제 개혁 등으로 국운이 다시 일어섰으며 후에 [[관세동맹]]을 성공시키고, 이는 훗날 [[독일 제국]]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무능은 어쩔 수 없었는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25년 동안 신하들이 열심히 뛰어다녔지 본인이 주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가만히 있었더라면 개혁군주가 될 뻔했지만, 개혁의 주체들이 혁명 사상에 영향 받아 [[자코뱅주의]]로 변질될까봐 극히 두려워했고 신하들을 불신했다. 자신의 멘토 알렉산드르 1세가 자유주의 성향이었다가 말년에 전제정치로 복귀한 것과 똑같이 말년에는 반동으로 돌아서 관료들이 열심히 한 개혁조차 모두 말아먹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